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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초 프란체스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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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초 프란체스콜리는 우루과이 출신의 전 축구 선수로,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1980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에서 데뷔하여 리버 플레이트, RC 파리,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칼리아리 칼초, 토리노 FC 등에서 뛰었으며, 리버 플레이트에서 선수 경력을 마쳤다. 그는 1983년, 1987년, 199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끌었고, 1984년과 1995년에는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은퇴 후에는 리버 플레이트의 선수 영입 담당자로 활동하며 팀의 성공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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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초 프란체스콜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07년의 엔소 프란체스콜리
2007년의 프란체스콜리
전체 이름엔소 프란체스콜리 우리아르테
180cm
출생일1961년 11월 12일
출생지몬테비데오, 우루과이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애칭왕자
클럽 경력
유소년 클럽원더러스
1980–1982원더러스
출장 (골)74 (20)
1983–1986리버 플레이트
출장 (골)113 (68)
1986–1989RC 파리
출장 (골)89 (32)
1989–1990마르세유
출장 (골)28 (11)
1990–1993칼리아리
출장 (골)98 (17)
1993–1994토리노
출장 (골)24 (3)
1994–1997리버 플레이트
출장 (골)84 (47)
총 출장 (골)510 (198)
국가대표 경력
1982–1997우루과이
출장 (골)73 (17)
메달 수상 내역
우승1983
우승1987
우승1995
준우승1989
준우승1985

2. 선수 경력

1980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에서 데뷔하였으며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었다. 그 후 프랑스의 RC 파리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뛰었다. 1990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칼리아리 칼초토리노 FC에서 활약했으며 1994년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와 그곳에서 은퇴했다.[57]

==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1980-1983) ==

페냐롤의 열렬한 팬이었던 프란체스콜리는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출전 기회 부족에 실망하여 합류하지 않았다.[5] 1983년에 합류하게 될 남미 명문 클럽 리버 플레이트에서도 성공적인 테스트를 치렀지만, 그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고등학교 축구팀에 남아 5번의 우승을 차지했다.[1]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클럽인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의 제안을 받아 입단했다. 1980년 원더러스 1군에 데뷔하여 1931년 이후 네 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던 이후 최고 성적인 2위를 달성했다. 우아한 플레이 스타일과 행동으로 그는 전 원더러스 선수인 한니발 치오카로부터 물려받은 "엘 프린시페"(El Príncipe,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입이 마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기 중에 껌을 씹는 습관을 들였다. 그는 경기 전에 껌이 없으면 불편할 정도로 그 습관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1]

1981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프란체스콜리는 페냐롤과 나시오날에 이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82년 2월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같은 해, 아이러니하게도 원더러스에서 최악의 성적(5위)을 거둔 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데뷔했다.[6]

198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프란체스콜리는 호르헤 바리오스, 루이스 알베르토 아코스타, 라울 에스날, 아리엘 크라소우스키 등 다른 주목할 만한 선수들과 함께 팀에서 좋은 시즌을 보냈다. 조별 예선에서 나시오날과 동률 1위를 차지했지만, 8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7]

== 리버 플레이트 (1983-1986, 1994-1998) ==

1983년 리버 플레이트 시절의 프란체스콜리


프란체스콜리가 1983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 우승한 후, 리버 플레이트는 그를 31만 달러에 영입했다.[8] 1984년, 프란체스콜리는 다른 선수들과 출전 시간을 나누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막바지에 아르헨티나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출전 시간이 늘었지만, 페로 카릴 오에스테에게 3-0으로 패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콜리는 리버 플레이트와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넬슨 구티에레스, 안토니오 알잠엔디 등과 함께 1984년 최고의 남미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성공을 갈망한 프란체스콜리는 아메리카 데 칼리(후에 칼리 카르텔의 자금 지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짐)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 팀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을 차지했다.[1]

1985년,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어 이 영예를 안은 최초의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1985-86 시즌에는 25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의 우승 결정전 5-4 승리에 기여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을 이끌었다. 1986년 1월, 아르헨티나 5대 클럽이 주최한 친선 대회에서 폴란드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린 바이시클 킥은 그의 가장 유명한 골로 기록되었다.[10] 1986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 33세의 나이에 토리노에서의 부진한 시즌을 보낸 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했다. 그는 여전히 최고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고, 그 해 아페르투라 챔피언십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리버 플레이트는 이 시즌에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20]

199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에게 패하고, 인데펜디엔테에게도 패했다. 하지만, 그는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10년 만에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 타이틀을 다시 받았다.[21]

1996년, 아리엘 오르테가, 마티아스 알메이다, 후안 파블로 소린, 에르난 크레스포, 마르셀로 얄라르도 등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이끌고 199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과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보카 주니어스의 15회 우승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1]

1996 인터컨티넨털컵에서는 유벤투스에게 패했다.[22] 이 경기에서 프란체스콜리의 팬이었던 지네딘 지단은 "프란체스콜리가 경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그가 되고 싶었습니다... 엔초는 신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1997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6강에서 레이싱 클럽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지만, 리버 플레이트는 클라우수라, 아페르투라,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석권하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1997년 12월 17일, 상파울루와의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 2차전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12월 21일,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며 1997 아페르투라 챔피언이 되었다. 1996 아페르투라와 1997 클라우수라 우승에 이어 아르헨티나 트레블을 달성했고, 라이벌 보카 주니어스를 제치고 리그에서 단 한 번만 패했다.

1999년 8월 1일, 프란체스콜리는 친선 경기인 작별 경기를 위해 모뉴멘탈로 돌아왔다.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훌리오 마리아 산구네티 우루과이 대통령을 비롯해 6만 5천 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리버 플레이트와 페냐롤의 경기는 페냐롤의 4-0 승리로 끝났다. 경기 후,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그라운드에 들어와 프란체스콜리를 비롯한 선수들의 사인을 받고 함께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은퇴 후, 리버 플레이트는 한동안 국내 대회에서만 성공을 거두었고, 2011년 전례 없는 강등을 당했다. 이는 프란체스콜리가 함께 199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한 지 정확히 15년 만이었다. 그는 198경기 115골로 팀 역대 득점 7위이며, 아르세니오 에리코와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에 이어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골을 넣은 외국인 선수이다.

== RC 파리 (1986-1989) ==

프란체스콜리는 1986년 RC 파리에서 유럽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2] 1950년대 이후 부진을 겪던 팀이었으며, 1970년 창단되어 전 시즌 프랑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웃 팀 파리 생제르맹과 경쟁했다. 자동차 회사 마트라(Matra)가 팀의 스폰서가 되면서 1987년 팀 이름이 마트라 레이싱으로 바뀌었다. 자동차 회사 거물 장-뤼크 라가르데르(Jean-Luc Lagardère)는 1993년 리그 1 우승, 국내컵 대회 우승,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목표로 루이스 페르난데스(Luis Fernández), 막심 보시스(Maxime Bossis), 티에리 튀소(Thierry Tusseau), 다비드 지놀라(David Ginola), 카메룬의 외젠 에케케(Eugène Ekéké), 네덜란드의 소니 실루이(Sonny Silooy), 독일의 피에르 리트바르스키(Pierre Littbarski), 그리고 우루과이의 동료 루벤 파스(Rubén Paz) 등을 영입했다. 프란체스콜리의 첫 시즌에 팀은 프란체스콜리의 14골(그 시즌 리그 득점 상위권) 덕분에 13위를 기록했다.[13]

프란체스콜리는 팀의 우상이 되었고, 1987년 프랑스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7-88 시즌에는 포르투갈 출신 감독 아르투르 조르주가 영입되었다.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투르 조르주를 자신의 선수 경력 중 최고의 감독으로 묘사했다. 마트라 레이싱은 시즌 후반부터 3위와 2위를 오가며 상위권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일련의 경기 후 모나코에 11점 뒤처지게 되었다. 프란체스콜리는 리그에서 8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이 기간에 미셸 플라티니(Michel Platini)의 은퇴로 유벤투스로부터 이적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프란체스콜리는 1988-89 시즌에도 3시즌 연속 팀 내 최다 득점자를 기록하며 강등을 면했다.[14]

마트라 레이싱의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콜리는 세계적인 스타로 인정받았다. 1989년 3월 지쿠의 은퇴 경기를 기념하는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2-1 승리에 기여하는 골을 넣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여러 차례 실망을 겪었고 쿠프 드 프랑스(Coupe de France)에서의 팀의 부진에 좌절했다. 레이싱은 곧 파산 신청을 하고 프랑스 리그에서 탈퇴하여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도시 라이벌 파리 생제르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15]

== 올랭피크 마르세유 (1989-1990) ==

마르세유로 이적한 프란체스콜리는 이 클럽에서 단 한 시즌만 보냈지만, 1989-90 프랑스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28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넣었다.[16] 이 활약으로 지네딘 지단의 관심을 끌었다. 프란체스콜리의 이탈은 그의 전 소속팀 레이싱에게 큰 손실이었고, 팀은 강등을 면치 못했다. 1989-90 쿠프 드 프랑스 준결승에서 프란체스콜리는 전 소속팀과 맞붙었는데, 레이싱이 승리했다. 경기 종료 8분 전, 프란체스콜리의 동점골은 규정 위반으로 무효 처리되었고, 마르세유는 결국 3-2로 패했다.[16] 한편, 프란체스콜리는 마르세유가 1989-90 유러피언컵 준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1989-90 시즌 리그에서 28경기에 출전, 11득점을 기록하며[57] 리그 우승과 함께 디비지옹 1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을 수상했다.[59] 그러나 UEFA 챔피언스리그(UEFA Champions Cup)에서는 준결승 벤피카전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60]

== 칼리아리 칼초 (1990-1993) ==

199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 패해 탈락한 후, 프란체스콜리는 이탈리아 세리에 A로 이적하여, 국제 대표팀 동료인 호세 에레라, 다니엘 폰세카와 함께 칼리아리에 입단하였다.[17] 이적 당시 현지 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57] 전 소속팀 마르세유와의 친선 경기가 데뷔전을 겸해 열렸고,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57] 코파 이탈리아 레체전에서 공식전 데뷔를, 인터 밀란전에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다.[57] 3라운드 아탈란타전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이적 후 첫 골을 넣었다.[57][62]

처음 두 시즌 동안 프란체스콜리는 팀이 강등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좀 더 깊은 미드필더 역할을 맡으면서 초반에는 부진을 겪었다.[17] 하지만 이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기대만큼의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다.[57] 더 깊은 위치에서 뛰었기 때문에 득점력은 떨어졌고, 1990-91 시즌에는 4골, 1991-92 시즌에는 6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17] 1991-92 시즌,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신임 감독은 그를 플레이메이커 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57] 부상에서 회복되자 실력을 발휘하며 팬들의 인기를 얻었다.[57] 칼리아리는 두 시즌 모두 강등을 면했지만, 1991-92 코파 이탈리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17]

프란체스콜리의 이탈리아에서의 세 번째 시즌은 그가 보여준 최고의 시즌이었다. 코파 이탈리아에서 그는 8강전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밀란(당시 리그 우승팀)에게 패하기 전까지 3골을 넣었다.[18] 1992-93 시즌, 31라운드 토리노전에서 프란체스콜리의 2골을 포함해 5-0 승리를 거두었고, 32라운드 AC 밀란전에서도 득점하며 활약했다.[57] 세리에 A에서는 칼리아리가 놀랍게도 6위를 차지하며 UEFA컵 진출권을 따냈고, 프란체스콜리는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인 7골을 기록했다.[18] 시즌 종료 후 6월에는 J리그의 요코하마 마리노스 입단이 확실시되었으나,[63] 이적은 성사되지 않았다.

프란체스콜리는 칼리아리에서 98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기록했다. (칼리아리에서 3시즌 동안 104경기 17골을 기록했다.)[57] 그의 핵심적인 활약 덕분에 그는 칼리아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칼리아리 명예의 전당과 팀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11에 포함되었다.[18]

== 토리노 FC (1993-1994) ==

1993년, 프란체스콜리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팀인 토리노 FC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 1993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결승전은 프란체스콜리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동안 우승컵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이었지만, 토리노는 결국 밀란에게 패배했다. 토리노는 다음 시즌 코파 이탈리아(1993–94) 타이틀 방어에 근접했지만, 준결승에서 안코나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1993-94 세리에 A 시즌은 더욱 치열했다. 처음에는 강등권과 싸웠지만, 토리노는 순위를 끌어올려 다음 시즌 UEFA컵(1994–95) 진출권을 확보했고, 토너먼트 진출에 필요한 점수보다 4점 더 많은 점수를 획득했다. 1993년 이탈리아컵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유러피언컵 위너스컵(1993–94)에서는 8강에 진출했지만, 결국 우승팀인 아스널에게 탈락했다.[1] 팀에게는 성공적인 시즌이었지만, 프란체스콜리는 개인적으로는 이전 시즌만큼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24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는데, 이는 이탈리아 리그에서 4시즌 동안 가장 낮은 득점 기록이었다.[19]

== 국가대표팀 경력 ==

엔초 프란체스콜리는 1981년 남미 U-20 선수권 대회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같은 해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했다.[24] 1982년 인도에서 열린 친선 대회에서 시니어 대표팀에 데뷔했으며, 1983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며 첫 국가대표팀 득점을 기록했다.[1] 이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우승을 차지했고, 프란체스콜리는 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86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칠레페루를 꺾고 본선에 진출했다.[1] 본선에서는 2무 2패로 3위 팀 중 하나로 겨우 2라운드에 진출했고,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었지만 팀은 1-6으로 패했다.[25] 16강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 패하며 탈락했다. 프란체스콜리는 이 대회를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최악의 경기력으로 평가했다.[25]

198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알사멘디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아르헨티나를 꺾고 결승에 진출, 칠레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1] 198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5경기 중 4경기에 출전하여 3승을 거두며 결승 라운드에 진출했지만, 마라카낭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

1990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는 볼리비아와 페루를 꺾고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에서는 대한민국에 1-0 승리를 거둔 것을 제외하고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16강에서 개최국 이탈리아에 2-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프란체스콜리는 1986년과 199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여 총 8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다.[24]

1990년 월드컵 이후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이 루이스 쿠빌라로 교체되면서 프란체스콜리는 "용병"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대표팀에서 제외되었고, 1991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하지 못했다. 1993년 코파 아메리카에 복귀했지만 벤치에 머물렀고, 우루과이는 8강에서 탈락했다.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도 출전했지만, 브라질에 패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31]

1995 코파 아메리카는 우루과이에서 개최되었고, 프란체스콜리는 주장으로 팀을 이끌며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32] 이 대회에서 프란체스콜리는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고, 파라과이와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마지막 골을 넣었다.[34]

프란체스콜리는 199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이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지만, 1998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팀이 고전하자 복귀하여 1997년까지 8경기에 더 출전했다. 우루과이는 결국 예선 탈락했고, 프란체스콜리는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프란체스콜리는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73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기록했으며, 37승 18무 18패를 기록했다.[36] 그는 코파 아메리카 4번의 대회에서 총 16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넣었고,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결승전에 진출했다.[35]

#날짜장소상대득점결과대회
1.1983년 10월 27일몬테비데오브라질1 – 02 – 01983 코파 아메리카[66]
2.1985년 1월 29일몬테비데오동독? – 03 – 0친선 경기
3.1985년 2월 3일몬테비데오파라과이1 – 01 – 0친선경기
4.1985년 2월 6일코차밤바볼리비아1 – 01 – 0친선 경기
5.1985년 2월 24일몬테비데오콜롬비아? – 03 – 0친선 경기
6.1985년 3월 31일키토에콰도르2 – 02 – 01986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7.1986년 6월 8일네사우알코요틀덴마크1 – 21 – 61986년 FIFA 월드컵[66]
8.1989년 7월 6일고이아니아칠레3 – 03 – 01989 코파 아메리카
9.1989년 7월 12일리우데자네이루파라과이1 – 03 – 01989 코파 아메리카
10.1989년 9월 17일몬테비데오볼리비아2 – 02 – 01990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11.1993년 8월 8일라파스볼리비아1 – 31 – 3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12.1993년 9월 12일몬테비데오볼리비아1 – 02 – 1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13.1995년 6월 28일리베라뉴질랜드? – ?2 – 2친선 경기
14.1995년 7월 5일몬테비데오베네수엘라3 – 14 – 11995 코파 아메리카
15.1995년 7월 9일몬테비데오파라과이1 – 01 – 01995 코파 아메리카[34]


2. 1. 클럽 경력

1980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에서 데뷔하였으며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었다. 그 후 프랑스의 RC 파리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뛰었다. 1990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칼리아리 칼초토리노 FC에서 활약했으며 1994년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돌아와 그곳에서 은퇴했다.[57]

==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1980-1983) ==

페냐롤의 열렬한 팬이었던 프란체스콜리는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출전 기회 부족에 실망하여 합류하지 않았다.[5] 1983년에 합류하게 될 남미 명문 클럽 리버 플레이트에서도 성공적인 테스트를 치렀지만, 그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고등학교 축구팀에 남아 5번의 우승을 차지했다.[1]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클럽인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의 제안을 받아 입단했다. 1980년 원더러스 1군에 데뷔하여 1931년 이후 네 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던 이후 최고 성적인 2위를 달성했다. 우아한 플레이 스타일과 행동으로 그는 전 원더러스 선수인 한니발 치오카로부터 물려받은 "엘 프린시페"(El Príncipe,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입이 마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기 중에 껌을 씹는 습관을 들였다. 그는 경기 전에 껌이 없으면 불편할 정도로 그 습관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1]

1981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프란체스콜리는 페냐롤과 나시오날에 이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82년 2월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같은 해, 아이러니하게도 원더러스에서 최악의 성적(5위)을 거둔 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데뷔했다.[6]

198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프란체스콜리는 호르헤 바리오스, 루이스 알베르토 아코스타, 라울 에스날, 아리엘 크라소우스키 등 다른 주목할 만한 선수들과 함께 팀에서 좋은 시즌을 보냈다. 조별 예선에서 나시오날과 동률 1위를 차지했지만, 8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7]

== 리버 플레이트 (1983-1986, 1994-1998) ==

프란체스콜리가 1983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 우승한 후, 리버 플레이트는 그를 31만 달러에 영입했다.[8] 1984년, 프란체스콜리는 다른 선수들과 출전 시간을 나누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막바지에 아르헨티나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출전 시간이 늘었지만, 페로 카릴 오에스테에게 3-0으로 패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콜리는 리버 플레이트와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넬슨 구티에레스, 안토니오 알잠엔디 등과 함께 1984년 최고의 남미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성공을 갈망한 프란체스콜리는 아메리카 데 칼리(후에 칼리 카르텔의 자금 지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짐)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 팀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을 차지했다.[1]

1985년,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어 이 영예를 안은 최초의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1985-86 시즌에는 25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의 우승 결정전 5-4 승리에 기여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을 이끌었다. 1986년 1월, 아르헨티나 5대 클럽이 주최한 친선 대회에서 폴란드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린 바이시클 킥은 그의 가장 유명한 골로 기록되었다.[10]

1983년 36만 달러의 이적료로 CA 리베르 플라테에 이적하여 4월 24일 클루브 페로 카릴 오에스테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 1984년에는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고 리그 득점왕과 최우수 선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우루과이 선수로서는 최초로 남미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1985-86 시즌에는 다시 한번 득점왕에 오르며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리베르 플라테에서는 113경기에 출전하여 68골을 기록했다.[56] 1986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 33세의 나이에 토리노에서의 부진한 시즌을 보낸 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했다. 그는 여전히 최고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고, 그 해 아페르투라 챔피언십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리버 플레이트는 이 시즌에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20]

199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에게 패하고, 인데펜디엔테에게도 패했다. 하지만, 그는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10년 만에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 타이틀을 다시 받았다.[21]

1996년, 아리엘 오르테가, 마티아스 알메이다, 후안 파블로 소린, 에르난 크레스포, 마르셀로 얄라르도 등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이끌고 199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과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보카 주니어스의 15회 우승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1]

1996 인터컨티넨털컵에서는 유벤투스에게 패했다.[22] 이 경기에서 프란체스콜리의 팬이었던 지네딘 지단은 "프란체스콜리가 경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그가 되고 싶었습니다... 엔초는 신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1997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6강에서 레이싱 클럽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지만, 리버 플레이트는 클라우수라, 아페르투라,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석권하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1997년 12월 17일, 상파울루와의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 2차전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12월 21일,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며 1997 아페르투라 챔피언이 되었다. 1996 아페르투라와 1997 클라우수라 우승에 이어 아르헨티나 트레블을 달성했고, 라이벌 보카 주니어스를 제치고 리그에서 단 한 번만 패했다.

1994년에 친정팀 CA 리베르 플라테에 복귀하여 4번의 리그 우승(아페르투라, 클라우수라)을 차지했고, 두 번째 득점왕에 올랐다. 1995년에는 다시 한번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준결승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전에서 원정골을 넣어[62] 결승 진출에 기여하는 등 대회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토요타컵에서는 유벤투스와 맞붙었지만 0-1로 패했다.[57] 1997년에는 상파울루를 결승에서 꺾고 남미 슈퍼컵 우승에 기여했다.

1999년 8월 1일, 프란체스콜리는 친선 경기인 작별 경기를 위해 모뉴멘탈로 돌아왔다.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훌리오 마리아 산구네티 우루과이 대통령을 비롯해 6만 5천 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리버 플레이트와 페냐롤의 경기는 페냐롤의 4-0 승리로 끝났다. 경기 후,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그라운드에 들어와 프란체스콜리를 비롯한 선수들의 사인을 받고 함께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은퇴 후, 리버 플레이트는 한동안 국내 대회에서만 성공을 거두었고, 2011년 전례 없는 강등을 당했다. 이는 프란체스콜리가 함께 199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한 지 정확히 15년 만이었다. 그는 198경기 115골로 팀 역대 득점 7위이며, 아르세니오 에리코와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에 이어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골을 넣은 외국인 선수이다.

1999년 8월 1일에는 페냐롤과의 은퇴 경기가 열렸는데, 8만 명의 관중 외에도 훌리오 마리아 산기네티 우루과이 대통령과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참석했다.[65]

== RC 파리 (1986-1989) ==

프란체스콜리는 1986년 RC 파리에서 유럽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2] 1950년대 이후 부진을 겪던 팀이었으며, 1970년 창단되어 전 시즌 프랑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웃 팀 파리 생제르맹과 경쟁했다. 자동차 회사 마트라(Matra)가 팀의 스폰서가 되면서 1987년 팀 이름이 마트라 레이싱으로 바뀌었다. 자동차 회사 거물 장-뤼크 라가르데르(Jean-Luc Lagardère)는 1993년 리그 1 우승, 국내컵 대회 우승,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목표로 루이스 페르난데스(Luis Fernández), 막심 보시스(Maxime Bossis), 티에리 튀소(Thierry Tusseau), 다비드 지놀라(David Ginola), 카메룬의 외젠 에케케(Eugène Ekéké), 네덜란드의 소니 실루이(Sonny Silooy), 독일의 피에르 리트바르스키(Pierre Littbarski), 그리고 우루과이의 동료 루벤 파스(Rubén Paz) 등을 영입했다. 프란체스콜리의 첫 시즌에 팀은 프란체스콜리의 14골(그 시즌 리그 득점 상위권) 덕분에 13위를 기록했다.[13]

프란체스콜리는 팀의 우상이 되었고, 1987년 프랑스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7-88 시즌에는 포르투갈 출신 감독 아르투르 조르주가 영입되었다.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투르 조르주를 자신의 선수 경력 중 최고의 감독으로 묘사했다. 마트라 레이싱은 시즌 후반부터 3위와 2위를 오가며 상위권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일련의 경기 후 모나코에 11점 뒤처지게 되었다. 프란체스콜리는 리그에서 8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이 기간에 미셸 플라티니(Michel Platini)의 은퇴로 유벤투스로부터 이적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프란체스콜리는 1988-89 시즌에도 3시즌 연속 팀 내 최다 득점자를 기록하며 강등을 면했다.[14]

마트라 레이싱의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콜리는 세계적인 스타로 인정받았다. 1989년 3월 지쿠의 은퇴 경기를 기념하는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2-1 승리에 기여하는 골을 넣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여러 차례 실망을 겪었고 쿠프 드 프랑스(Coupe de France)에서의 팀의 부진에 좌절했다. 레이싱은 곧 파산 신청을 하고 프랑스 리그에서 탈퇴하여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도시 라이벌 파리 생제르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15]

== 올랭피크 마르세유 (1989-1990) ==

마르세유(Olympique de Marseille)로 이적한 프란체스콜리는 이 클럽에서 단 한 시즌만 보냈지만, 1989-90 프랑스 1부 리그(1989–90 French Division 1) 우승을 차지했고, 28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넣었다.[16] 이 활약으로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의 관심을 끌었다. 프란체스콜리의 이탈은 그의 전 소속팀 레이싱에게 큰 손실이었고, 팀은 강등을 면치 못했다. 1989-90 쿠프 드 프랑스(1989–90 Coupe de France) 준결승에서 프란체스콜리는 전 소속팀과 맞붙었는데, 레이싱이 승리했다. 경기 종료 8분 전, 프란체스콜리의 동점골은 규정 위반으로 무효 처리되었고, 마르세유는 결국 3-2로 패했다.[16] 한편, 프란체스콜리는 마르세유가 1989-90 유러피언컵(1989–90 European Cup) 준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1989-90 시즌 리그에서 28경기에 출전, 11득점을 기록하며[57] 리그 우승과 함께 디비지옹 1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을 수상했다.[59] 그러나 UEFA 챔피언스리그(UEFA Champions Cup)에서는 준결승 벤피카(SL Benfica)전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60]

== 칼리아리 칼초 (1990-1993) ==

199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 패해 탈락한 후, 프란체스콜리는 이탈리아 세리에 A로 이적하여, 국제 대표팀 동료인 호세 에레라, 다니엘 폰세카와 함께 칼리아리에 입단하였다.[17] 이적 당시 현지 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57] 전 소속팀 마르세유와의 친선 경기가 데뷔전을 겸해 열렸고,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57] 코파 이탈리아 레체전에서 공식전 데뷔를, 인터 밀란전에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다.[57] 3라운드 아탈란타전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이적 후 첫 골을 넣었다.[57][62]

처음 두 시즌 동안 프란체스콜리는 팀이 강등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좀 더 깊은 미드필더 역할을 맡으면서 초반에는 부진을 겪었다.[17] 하지만 이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기대만큼의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다.[57] 더 깊은 위치에서 뛰었기 때문에 득점력은 떨어졌고, 1990-91 시즌에는 4골, 1991-92 시즌에는 6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17] 1991-92 시즌,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신임 감독은 그를 플레이메이커 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57] 부상에서 회복되자 실력을 발휘하며 팬들의 인기를 얻었다.[57] 칼리아리는 두 시즌 모두 강등을 면했지만, 1991-92 코파 이탈리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17]

프란체스콜리의 이탈리아에서의 세 번째 시즌은 그가 보여준 최고의 시즌이었다. 코파 이탈리아에서 그는 8강전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밀란(당시 리그 우승팀)에게 패하기 전까지 3골을 넣었다.[18] 1992-93 시즌, 31라운드 토리노전에서 프란체스콜리의 2골을 포함해 5-0 승리를 거두었고, 32라운드 AC 밀란전에서도 득점하며 활약했다.[57] 세리에 A에서는 칼리아리가 놀랍게도 6위를 차지하며 UEFA컵 진출권을 따냈고, 프란체스콜리는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인 7골을 기록했다.[18] 팀은 6위를 차지하며 다음 시즌 UEFA컵 출전권을 획득했다.[57] 시즌 종료 후 6월에는 J리그의 요코하마 마리노스 입단이 확실시되었으나,[63] 이적은 성사되지 않았다.

총적으로 프란체스콜리는 칼리아리에서 98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기록했다. (칼리아리에서 3시즌 동안 104경기 17골을 기록했다.)[57] 그의 핵심적인 활약 덕분에 그는 칼리아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칼리아리 명예의 전당과 팀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11에 포함되었다.[18] 칼리아리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11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64]

== 토리노 FC (1993-1994) ==

1993년, 프란체스콜리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팀인 토리노 FC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 1993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결승전은 프란체스콜리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동안 우승컵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이었지만, 토리노는 결국 밀란에게 패배했다. 토리노는 다음 시즌 코파 이탈리아(1993–94) 타이틀 방어에 근접했지만, 준결승에서 안코나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1993-94 세리에 A 시즌은 더욱 치열했다. 처음에는 강등권과 싸웠지만, 토리노는 순위를 끌어올려 다음 시즌 UEFA컵(1994–95) 진출권을 확보했고, 토너먼트 진출에 필요한 점수보다 4점 더 많은 점수를 획득했다. 1993년 이탈리아컵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유러피언컵 위너스컵(1993–94)에서는 8강에 진출했지만, 결국 우승팀인 아스널에게 탈락했다.[1] 팀에게는 성공적인 시즌이었지만, 프란체스콜리는 개인적으로는 이전 시즌만큼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24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는데, 이는 이탈리아 리그에서 4시즌 동안 가장 낮은 득점 기록이었다.[19] 동포 아길레라의 권유로 토리노 FC에서 뛰게 되었다.[57]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세리에 B의 안코나에게 패해 결승 진출은 실패했다. 부상으로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리그에서는 24경기 3골에 그쳤다.[57]

2. 1. 1.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1980-1983)



페냐롤의 열렬한 팬이었던 프란체스콜리는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출전 기회 부족에 실망하여 합류하지 않았다.[5] 1983년에 합류하게 될 남미 명문 클럽 리버 플레이트에서도 성공적인 테스트를 치렀지만, 그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고등학교 축구팀에 남아 5번의 우승을 차지했다.[1]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클럽인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의 제안을 받아 입단했다. 1980년 원더러스 1군에 데뷔하여 1931년 이후 네 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던 이후 최고 성적인 2위를 달성했다. 우아한 플레이 스타일과 행동으로 그는 전 원더러스 선수인 한니발 치오카로부터 물려받은 "엘 프린시페"(El Príncipe,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입이 마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기 중에 껌을 씹는 습관을 들였다. 그는 경기 전에 껌이 없으면 불편할 정도로 그 습관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1]

1981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프란체스콜리는 페냐롤과 나시오날에 이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82년 2월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같은 해, 아이러니하게도 원더러스에서 최악의 성적(5위)을 거둔 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데뷔했다.[6]

198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프란체스콜리는 호르헤 바리오스, 루이스 알베르토 아코스타, 라울 에스날, 아리엘 크라소우스키 등 다른 주목할 만한 선수들과 함께 팀에서 좋은 시즌을 보냈다. 조별 예선에서 나시오날과 동률 1위를 차지했지만, 8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7]

2. 1. 2. 리버 플레이트 (1983-1986, 1994-1998)



프란체스콜리가 1983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 우승한 후, 리버 플레이트는 그를 31만 달러에 영입했다.[8] 1984년, 프란체스콜리는 다른 선수들과 출전 시간을 나누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막바지에 아르헨티나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출전 시간이 늘었지만, 페로 카릴 오에스테에게 3-0으로 패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콜리는 리버 플레이트와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넬슨 구티에레스, 안토니오 알잠엔디 등과 함께 1984년 최고의 남미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성공을 갈망한 프란체스콜리는 아메리카 데 칼리(후에 칼리 카르텔의 자금 지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짐)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 팀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을 차지했다.[1]

1985년,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어 이 영예를 안은 최초의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1985-86 시즌에는 25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의 우승 결정전 5-4 승리에 기여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을 이끌었다. 1986년 1월, 아르헨티나 5대 클럽이 주최한 친선 대회에서 폴란드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린 바이시클 킥은 그의 가장 유명한 골로 기록되었다.[10]

1994년, 33세의 나이에 토리노에서의 부진한 시즌을 보낸 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리버 플레이트로 복귀했다. 그는 여전히 최고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고, 그 해 아페르투라 챔피언십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리버 플레이트는 이 시즌에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20]

199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에게 패하고, 인데펜디엔테에게도 패했다. 하지만, 그는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10년 만에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 타이틀을 다시 받았다.[21]

1996년, 아리엘 오르테가, 마티아스 알메이다, 후안 파블로 소린, 에르난 크레스포, 마르셀로 얄라르도 등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이끌고 199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과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보카 주니어스의 15회 우승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1]

1996 인터컨티넨털컵에서는 유벤투스에게 패했다.[22] 이 경기에서 프란체스콜리의 팬이었던 지네딘 지단은 "프란체스콜리가 경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그가 되고 싶었습니다... 엔초는 신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1997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6강에서 레이싱 클럽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지만, 리버 플레이트는 클라우수라, 아페르투라,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석권하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1997년 12월 17일, 상파울루와의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 2차전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12월 21일,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며 1997 아페르투라 챔피언이 되었다. 1996 아페르투라와 1997 클라우수라 우승에 이어 아르헨티나 트레블을 달성했고, 라이벌 보카 주니어스를 제치고 리그에서 단 한 번만 패했다.

1999년 8월 1일, 프란체스콜리는 친선 경기인 작별 경기를 위해 모뉴멘탈로 돌아왔다.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훌리오 마리아 산구네티 우루과이 대통령을 비롯해 6만 5천 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리버 플레이트와 페냐롤의 경기는 페냐롤의 4-0 승리로 끝났다. 경기 후,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그라운드에 들어와 프란체스콜리를 비롯한 선수들의 사인을 받고 함께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은퇴 후, 리버 플레이트는 한동안 국내 대회에서만 성공을 거두었고, 2011년 전례 없는 강등을 당했다. 이는 프란체스콜리가 함께 199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한 지 정확히 15년 만이었다. 그는 198경기 115골로 팀 역대 득점 7위이며, 아르세니오 에리코와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에 이어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골을 넣은 외국인 선수이다.

1983년 36만 달러의 이적료로 CA 리베르 플라테에 이적하여 4월 24일 클루브 페로 카릴 오에스테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 1984년에는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고 리그 득점왕과 최우수 선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우루과이 선수로서는 최초로 남미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1985-86 시즌에는 다시 한번 득점왕에 오르며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리베르 플라테에서는 113경기에 출전하여 68골을 기록했다.[56] 1986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기여했다.

1994년에 친정팀 CA 리베르 플라테에 복귀하여 4번의 리그 우승(아페르투라, 클라우수라)을 차지했고, 두 번째 득점왕에 올랐다. 1995년에는 다시 한번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준결승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전에서 원정골을 넣어[62] 결승 진출에 기여하는 등 대회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토요타컵에서는 유벤투스와 맞붙었지만 0-1로 패했다.[57] 1997년에는 상파울루를 결승에서 꺾고 남미 슈퍼컵 우승에 기여했다.

1999년 8월 1일에는 페냐롤과의 은퇴 경기가 열렸는데, 8만 명의 관중 외에도 훌리오 마리아 산기네티 우루과이 대통령과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참석했다.[65]

2. 1. 3. RC 파리 (1986-1989)

프란체스콜리는 1986년 RC 파리에서 유럽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2] 1950년대 이후 부진을 겪던 팀이었으며, 1970년 창단되어 전 시즌 프랑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웃 팀 파리 생제르맹과 경쟁했다. 자동차 회사 마트라(Matra)가 팀의 스폰서가 되면서 1987년 팀 이름이 마트라 레이싱으로 바뀌었다. 자동차 회사 거물 장-뤼크 라가르데르(Jean-Luc Lagardère)는 1993년 리그 1 우승, 국내컵 대회 우승,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목표로 루이스 페르난데스(Luis Fernández), 막심 보시스(Maxime Bossis), 티에리 튀소(Thierry Tusseau), 다비드 지놀라(David Ginola), 카메룬의 외젠 에케케(Eugène Ekéké), 네덜란드의 소니 실루이(Sonny Silooy), 독일의 피에르 리트바르스키(Pierre Littbarski), 그리고 우루과이의 동료 루벤 파스(Rubén Paz) 등을 영입했다. 프란체스콜리의 첫 시즌에 팀은 프란체스콜리의 14골(그 시즌 리그 득점 상위권) 덕분에 13위를 기록했다.[13]

프란체스콜리는 팀의 우상이 되었고, 1987년 프랑스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7-88 시즌에는 포르투갈 출신 감독 아르투르 조르주가 영입되었다.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투르 조르주를 자신의 선수 경력 중 최고의 감독으로 묘사했다. 마트라 레이싱은 시즌 후반부터 3위와 2위를 오가며 상위권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일련의 경기 후 모나코에 11점 뒤처지게 되었다. 프란체스콜리는 리그에서 8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이 기간에 미셸 플라티니(Michel Platini)의 은퇴로 유벤투스로부터 이적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프란체스콜리는 1988-89 시즌에도 3시즌 연속 팀 내 최다 득점자를 기록하며 강등을 면했다.[14]

마트라 레이싱의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콜리는 세계적인 스타로 인정받았다. 1989년 3월 지쿠의 은퇴 경기를 기념하는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2-1 승리에 기여하는 골을 넣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여러 차례 실망을 겪었고 쿠프 드 프랑스(Coupe de France)에서의 팀의 부진에 좌절했다. 레이싱은 곧 파산 신청을 하고 프랑스 리그에서 탈퇴하여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도시 라이벌 파리 생제르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15]

2. 1. 4. 올랭피크 마르세유 (1989-1990)

마르세유(Olympique de Marseille)로 이적한 프란체스콜리는 이 클럽에서 단 한 시즌만 보냈지만, 1989-90 프랑스 1부 리그(1989–90 French Division 1) 우승을 차지했고, 28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넣었다.[16] 이 활약으로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의 관심을 끌었다. 프란체스콜리의 이탈은 그의 전 소속팀 레이싱에게 큰 손실이었고, 팀은 강등을 면치 못했다. 1989-90 쿠프 드 프랑스(1989–90 Coupe de France) 준결승에서 프란체스콜리는 전 소속팀과 맞붙었는데, 레이싱이 승리했다. 경기 종료 8분 전, 프란체스콜리의 동점골은 규정 위반으로 무효 처리되었고, 마르세유는 결국 3-2로 패했다.[16] 한편, 프란체스콜리는 마르세유가 1989-90 유러피언컵(1989–90 European Cup) 준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1989-90 시즌 리그에서 28경기에 출전, 11득점을 기록하며[57] 리그 우승과 함께 디비지옹 1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을 수상했다.[59] 그러나 UEFA 챔피언스리그(UEFA Champions Cup)에서는 준결승 벤피카(SL Benfica)전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60]

2. 1. 5. 칼리아리 칼초 (1990-1993)

199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 패해 탈락한 후, 프란체스콜리는 이탈리아 세리에 A로 이적하여, 국제 대표팀 동료인 호세 에레라, 다니엘 폰세카와 함께 칼리아리에 입단하였다.[17] 이적 당시 현지 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57] 전 소속팀 마르세유와의 친선 경기가 데뷔전을 겸해 열렸고,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57] 코파 이탈리아 레체전에서 공식전 데뷔를, 인터 밀란전에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다.[57] 3라운드 아탈란타전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이적 후 첫 골을 넣었다.[57][62]

처음 두 시즌 동안 프란체스콜리는 팀이 강등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좀 더 깊은 미드필더 역할을 맡으면서 초반에는 부진을 겪었다.[17] 하지만 이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기대만큼의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다.[57] 더 깊은 위치에서 뛰었기 때문에 득점력은 떨어졌고, 1990-91 시즌에는 4골, 1991-92 시즌에는 6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17] 1991-92 시즌,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신임 감독은 그를 플레이메이커 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57] 부상에서 회복되자 실력을 발휘하며 팬들의 인기를 얻었다.[57] 칼리아리는 두 시즌 모두 강등을 면했지만, 1991-92 코파 이탈리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17]

프란체스콜리의 이탈리아에서의 세 번째 시즌은 그가 보여준 최고의 시즌이었다. 코파 이탈리아에서 그는 8강전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밀란(당시 리그 우승팀)에게 패하기 전까지 3골을 넣었다.[18] 1992-93 시즌, 31라운드 토리노전에서 프란체스콜리의 2골을 포함해 5-0 승리를 거두었고, 32라운드 AC 밀란전에서도 득점하며 활약했다.[57] 세리에 A에서는 칼리아리가 놀랍게도 6위를 차지하며 UEFA컵 진출권을 따냈고, 프란체스콜리는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인 7골을 기록했다.[18] 팀은 6위를 차지하며 다음 시즌 UEFA컵 출전권을 획득했다.[57] 시즌 종료 후 6월에는 J리그의 요코하마 마리노스 입단이 확실시되었으나,[63] 이적은 성사되지 않았다.

총적으로 프란체스콜리는 칼리아리에서 98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기록했다. (칼리아리에서 3시즌 동안 104경기 17골을 기록했다.)[57] 그의 핵심적인 활약 덕분에 그는 칼리아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칼리아리 명예의 전당과 팀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11에 포함되었다.[18] 칼리아리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11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64]

2. 1. 6. 토리노 FC (1993-1994)

1993년, 프란체스콜리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팀인 토리노 FC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 1993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결승전은 프란체스콜리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동안 우승컵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이었지만, 토리노는 결국 밀란에게 패배했다. 토리노는 다음 시즌 코파 이탈리아(1993–94) 타이틀 방어에 근접했지만, 준결승에서 안코나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1993-94 세리에 A 시즌은 더욱 치열했다. 처음에는 강등권과 싸웠지만, 토리노는 순위를 끌어올려 다음 시즌 UEFA컵(1994–95) 진출권을 확보했고, 토너먼트 진출에 필요한 점수보다 4점 더 많은 점수를 획득했다. 1993년 이탈리아컵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유러피언컵 위너스컵(1993–94)에서는 8강에 진출했지만, 결국 우승팀인 아스널에게 탈락했다.[1] 팀에게는 성공적인 시즌이었지만, 프란체스콜리는 개인적으로는 이전 시즌만큼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24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는데, 이는 이탈리아 리그에서 4시즌 동안 가장 낮은 득점 기록이었다.[19] 동포 아길레라의 권유로 토리노 FC에서 뛰게 되었다.[57]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세리에 B의 안코나에게 패해 결승 진출은 실패했다. 부상으로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리그에서는 24경기 3골에 그쳤다.[57]

2. 2. 국가대표팀 경력

엔초 프란체스콜리는 1981년 남미 U-20 선수권 대회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같은 해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했다.[24] 1982년 인도에서 열린 친선 대회에서 시니어 대표팀에 데뷔했으며, 1983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며 첫 국가대표팀 득점을 기록했다.[1] 이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우승을 차지했고, 프란체스콜리는 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86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칠레페루를 꺾고 본선에 진출했다.[1] 본선에서는 2무 2패로 3위 팀 중 하나로 겨우 2라운드에 진출했고,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었지만 팀은 1-6으로 패했다.[25] 16강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 패하며 탈락했다. 프란체스콜리는 이 대회를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최악의 경기력으로 평가했다.[25]

198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알사멘디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아르헨티나를 꺾고 결승에 진출, 칠레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1] 198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5경기 중 4경기에 출전하여 3승을 거두며 결승 라운드에 진출했지만, 마라카낭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

1990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는 볼리비아와 페루를 꺾고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에서는 대한민국에 1-0 승리를 거둔 것을 제외하고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16강에서 개최국 이탈리아에 2-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프란체스콜리는 1986년과 199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여 총 8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다.[24]

1990년 월드컵 이후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이 루이스 쿠빌라로 교체되면서 프란체스콜리는 "용병"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대표팀에서 제외되었고, 1991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하지 못했다. 1993년 코파 아메리카에 복귀했지만 벤치에 머물렀고, 우루과이는 8강에서 탈락했다.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도 출전했지만, 브라질에 패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31]

1995 코파 아메리카는 우루과이에서 개최되었고, 프란체스콜리는 주장으로 팀을 이끌며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32] 이 대회에서 프란체스콜리는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고, 파라과이와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마지막 골을 넣었다.[34]

프란체스콜리는 199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이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지만, 1998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팀이 고전하자 복귀하여 1997년까지 8경기에 더 출전했다. 우루과이는 결국 예선 탈락했고, 프란체스콜리는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프란체스콜리는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73경기에 출전하여 17골을 기록했으며, 37승 18무 18패를 기록했다.[36] 그는 코파 아메리카 4번의 대회에서 총 16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넣었고,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결승전에 진출했다.[35]

#날짜장소상대득점결과대회
1.1983년 10월 27일몬테비데오브라질1 – 02 – 01983 코파 아메리카[66]
2.1985년 1월 29일몬테비데오동독? – 03 – 0친선 경기
3.1985년 2월 3일몬테비데오파라과이1 – 01 – 0친선경기
4.1985년 2월 6일코차밤바볼리비아1 – 01 – 0친선 경기
5.1985년 2월 24일몬테비데오콜롬비아? – 03 – 0친선 경기
6.1985년 3월 31일키토에콰도르2 – 02 – 01986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7.1986년 6월 8일네사우알코요틀덴마크1 – 21 – 61986년 FIFA 월드컵[66]
8.1989년 7월 6일고이아니아칠레3 – 03 – 01989 코파 아메리카
9.1989년 7월 12일리우데자네이루파라과이1 – 03 – 01989 코파 아메리카
10.1989년 9월 17일몬테비데오볼리비아2 – 02 – 01990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11.1993년 8월 8일라파스볼리비아1 – 31 – 3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12.1993년 9월 12일몬테비데오볼리비아1 – 02 – 1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13.1995년 6월 28일리베라뉴질랜드? – ?2 – 2친선 경기
14.1995년 7월 5일몬테비데오베네수엘라3 – 14 – 11995 코파 아메리카
15.1995년 7월 9일몬테비데오파라과이1 – 01 – 01995 코파 아메리카[34]


3. 플레이 스타일

1984년 페로 카릴 오에스테와의 경기 중 프란체스콜리


빠르고, 우아하며, 창의적이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프란체스콜리는 중앙 세컨드 스트라이커로도 뛸 수 있었다.[37][38] 그는 주목할 만한 속도는 부족했지만, 뛰어난 볼 컨트롤, 우아함, 유연성, 드리블 기술, 볼 터치 능력을 갖췄다.[37][38] 양발을 모두 잘 쓰는 플레이메이커로 뛰어난 시야, 패싱 능력, 미드필드에서의 득점 감각을 갖춘 그는 세트피스에서도 능력을 발휘했으며, 오버헤드 킥으로 묘기를 부리는 골을 넣는 것을 즐겼다.[38][39]

이러한 그의 특징은 프랑스의 공격형 미드필더 지네딘 지단의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37] 지단은 어린 시절 미셸 플라티니와 함께 프란체스콜리를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꼽았으며, 그가 마르세유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봤다고 한다. 지단은 아들 앙소의 이름을 프란체스콜리에게 경의를 표하여 짓기도 했다.[37] 1996년 인터컨티넨탈컵 결승전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두 선수는 경기가 끝난 후 유니폼을 교환했고, 이 유니폼은 지단이 가장 좋아하는 유니폼이 되었다.[37]

프란체스콜리는 지네딘 지단을 비롯한 다른 프랑스 선수들에게도 존경심을 표했으며, 프랑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보다 프랑스 팬들로부터 더 큰 존경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선수로는 엔초 페레스, 엔초 페르난데스가 있다.[40] 아르헨티나 공격수 디에고 밀리토는 인터 밀란에서 뛰는 동안 우아한 플레이 스타일과 프란체스콜리와의 외모 유사성 때문에 "''일 프린치페''"(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41] 프란체스콜리는 자신의 두 아들보다 밀리토가 외모와 걸음걸이 모두 자신과 더 닮았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또한 어린 시절 프란체스콜리의 팬이었던 아르헨티나 공격형 미드필더 하비에르 파스토레는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과 마른 체격 때문에 프란체스콜리의 또 다른 별명인 "''엘 플라코''"(마른 체격)라는 별명을 얻었다.[42]

프란체스콜리의 재능은 2004년 3월 펠레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125인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우루과이 선수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43] 늘씬한 체격에 화려한 테크닉과[74], 우아하고 세련된[75], 흐르는 듯한 볼 컨트롤이 특징이었으며, 공격의 중심이 되는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였다[74].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엘 프린시페(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76].

CA리베르 플라테에서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 축구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77] 따라서 조국 우루과이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2010년 FIFA 월드컵은 양국 모두를 응원했다.

4. 은퇴 이후

프란체스콜리와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이었던 마우리시오 마크리, 2012년 친선 경기에서


은퇴 후 프란체스콜리는 후안 파블로 소린, 빅토르 아리스티사발, 디에고 마라도나 등의 은퇴 기념 친선 경기에만 출전했다.[69] 마라도나리버 플레이트 팬들의 반대로 경기에 거의 참가하지 못할 뻔 했으나, 프란체스콜리는 친구들과 종교, 정치, 축구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며 그를 옹호했다.[70] 그는 자신이 본 가장 위대한 선수로 마라도나를 꼽았고, 두 번째는 지네딘 지단이라고 밝혔다.

2012년 7월 아리엘 오르테가의 은퇴 기념 경기에서 프란체스콜리는 50세의 나이에 4골을 넣었는데, 마지막 골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의 바이시클 킥이었다.[23] 가족과 함께 마이애미로 이주하여 전 매니저인 파코 카살과 함께 GOL TV 방송국을 설립했다. 5년 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미국에서의 활동 때문에 매달 미국을 방문했다. 2010년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의 국영 방송사인 채널 7 아르헨티나 팀을 이끌었다.[73]

텔레비전을 떠난 후 프란체스콜리는 여러 차례 리버 플레이트 감독직 제안을 받았지만, 기업가로서 배운 교훈을 활용할 수 있다면 감독직은 수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며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루과이에서 그가 더 많은 수락을 받지 못하게 한 요인 중 하나는 파코 카살과의 관계였다. 그의 회사인 텐필드 SA를 통해 축구 중계권을 매입한 것을 두고 우루과이에서는 논란이 있었다. 프란체스콜리는 카살에 대해 "그는 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가이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부터 [그의 권력을] 쌓았습니다. 그는 축구와 카니발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관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의견의] 분열이 생깁니다... 그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선수로서 리베르 플라테에서 많은 승리를 거둔 프란체스콜리는 로돌포 라울 도노프리오 체제 하에서 리더십 역할로 다시 클럽에 합류했다. 프란체스콜리는 리베르 플라테의 선수 영입 담당자가 되었고, 라몬 디아스(Ramón Díaz)의 이탈 후 젊은 감독이자 전 리베르 플라테 동료인 마르셀로 갈라르도(Marcelo Gallardo)를 영입한 것은 그의 결정이었다. 갈라르도 감독 선임 후 리베르 플라테는 2014 코파 수다메리카나(Copa Sudamericana 2014), 2015 레코파 수다메리카나(Recopa Sudamericana 2015), 2015 코파 리베르타도레스(Copa Libertadores 2015)를 석권했다. 또한 2015 스루가 은행 챔피언십(Suruga Bank Championship 2015)에서도 우승했다. 그의 리더십과 갈라르도 감독의 지휘 아래 리베르 플라테는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를 꺾고 2018 코파 리베르타도레스(Copa Libertadores 2018)에서 우승했다.

2002년에는 아내와 함께 미국 마이애미로 이주했으며 2003년에는 넬손 구티에레스 등과 함께 영어 축구 채널인 GOL TV사를 설립했다 . 현재는 동사와 텐필드사의 부사장을 맡고 있다[69].

5. 수상 내역

'''클럽'''

엔초 프란체스콜리는 리버 플레이트에서 1985–86, 1994 아페르투라, 1996 아페르투라, 1997 클라우수라, 1997 아페르투라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44] 또한 199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1997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44]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소속으로는 1989-90 시즌 리그 1 우승을 달성했다.[44]

'''국가대표팀'''

엔초 프란체스콜리는 1981년 남아메리카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44]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1983년, 1987년, 1995년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44]

'''개인'''

5. 1. 클럽

엔초 프란체스콜리는 리버 플레이트에서 1985–86, 1994 아페르투라, 1996 아페르투라, 1997 클라우수라, 1997 아페르투라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44] 또한 199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1997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44]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소속으로는 1989-90 시즌 리그 1 우승을 달성했다.[44]

5. 2. 국가대표팀

엔초 프란체스콜리는 1981년 남아메리카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44]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1983년, 1987년, 1995년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44]

5. 3. 개인

참조

[1] 간행물 Enzo Francescoli El Gráfico 2010-11-00
[2] 웹사이트 Palabra de ídolo http://www.elgrafico[...] 2011-03-01
[3] 웹사이트 Enzo Francescoli – International Appearances https://www.rsssf.or[...] 2012-07-04
[4] 웹사이트 IFFHS' Century Elections https://www.rsssf.or[...] 2000-01-30
[5] 웹사이트 Las 100 preguntas a Enzo Francescoli http://www.elgrafico[...] El Gráfico 2015-10-23
[6] 웹사이트 Uruguay - Liguilla Pre-Libertadores All Results https://www.rsssf.or[...] 2004-01-10
[7] 웹사이트 Copa Libertadores de América 1983 https://www.rsssf.or[...] 2005-03-18
[8] 간행물 ¿Se puede ir a la B? El Gráfico 2010-05-00
[9] 웹사이트 Argentina - List of Topscorers https://www.rsssf.or[...] 2009-07-09
[10] 간행물 Una chilena que hizo historia y generó imitadores El Gráfico 2012-08-00
[11] 간행물 Francescoli, um ótimo investimento Placar 1986-03-17
[12] 웹사이트 LA BATTAGLIA DEI GIGANTI http://ricerca.repub[...] La Repubblica 2016-01-08
[13] 웹사이트 Saison 1986-1987 http://allezracing.f[...] Allez Racing 2011-03-16
[14] 웹사이트 France - Cup History 1917-1997 https://www.rsssf.or[...] 2004-04-08
[15] 간행물 No olho da rua Revista ESPN 2012-02-00
[16] 웹사이트 Il y a 20 ans, l'injustice http://www.om110ans.[...] RSSSF 2010-03-11
[17] 웹사이트 Coppa Italia History https://www.rsssf.or[...] 2009-04-03
[18] 웹사이트 Speciale: Top 11 - Cagliari http://www.cagliaric[...] Cagliari Calcio.com 2016-01-08
[19] 웹사이트 Italy Super Cup Finals https://www.rsssf.or[...] 2010-09-17
[20] 간행물 También fue campeón invicto El Gráfico 2012-08-00
[21] 웹사이트 Final Tables Argentina 1991-2000 https://www.rsssf.or[...] 2004-03-27
[22] 웹사이트 ntercontinental Cup 1996 http://www.juventus.[...] Juventus.com 2016-01-07
[23] 뉴스 Today on YouTube: 50-year-old Uruguayan legend Enzo Francescoli's blissful bicycle kick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2014-06-06
[24] 웹사이트 Enzo FRANCESCOLI https://www.fifa.com[...] FIFA.com 2016-01-08
[25] 웹사이트 Denmark - Uruguay http://www.planetwor[...] planetworldcup.com 2014-11-26
[26] 웹사이트 Enzo Francescoli - International Appearances https://www.rsssf.or[...] 2008-07-31
[27] 웹사이트 World Cup 1986 https://www.rsssf.or[...] 2011-03-01
[28] 웹사이트 World Cup 1990 https://www.rsssf.or[...] 2011-03-01
[29] 웹사이트 World Cup 1994 qualifications https://www.rsssf.or[...] 201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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